김근태기념치유센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인권 가치를 기반으로 폭력 그동안 우리 사회가 들여다보지 못했던
고문피해자를 지원하고,
고문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대합니다]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개소 10주년에 초청합니다.6월 26일(월) 오후 3시,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10주년 기념행사를 합니다.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는 물론 만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지난 10...
22/06/2023

[초대합니다]

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개소 10주년에 초청합니다.

6월 26일(월) 오후 3시,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10주년 기념행사를 합니다.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는 물론 만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난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처음의 각오와 의지를 겸허히 돌아보는 자리에 함께 해주세요.

세월이 흘러도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피해자들과 정의의 편에 서 있겠다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다시 모아보는 자리에 함께 해주세요.

-일시: 2023년 6월 26일 오후 3시
-장소: 성가소비녀회 내 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주소: 성북구 길음로 9길 46번지)
-문의: 02-711-7588

김근태기념치유센터‘숨’ 올림

[공익제보자 집단 치유 프로그램]“우리 사회의 공익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의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한 이들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며 연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우리 모두는 공익제보자들에게 빚을 ...
22/06/2023

[공익제보자 집단 치유 프로그램]

“우리 사회의 공익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의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한 이들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며 연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공익제보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 곳곳에서 그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우리에게는 더 나은 사회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은 산산조각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이들을 위한 작은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민주화를 위해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한시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을 투입해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전두환과 신군부는1979년 12.12 군사반란과1980년 5.17내란...
18/05/2023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을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내란을 일으키고, 5.18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정권의 합리화와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안보 위협, 불안, 공포를 조장했습니다.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규정, 국가폭력을 가했습니다.

5.18로부터 약 한달 전, 사북항쟁.
4월 21일부터 사측과 어용노조의 횡포에 맞서
광산노동자와 가족 6,000여 명이 생존권을 위해 항쟁했습니다.

5월 6일부터 계엄사 합동수사단은 이들을 연행,
배후세력을 추궁하고 간첩으로 내몰며 고문했습니다.
계엄사가 공수부대 투입을 고려했던 광주학살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간첩조작. 광주학살 이후, 국가폭력은 형태를 달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하 보안사와 안기부, 치안본부는
정권에 부응하며, 승진과 포상의 수단으로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수사 간 불법 연행, 구금, 고문이 행해졌고
검찰 조사와 재판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권력에 통제되어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일가족, 납북어부, 유학생, 재일동포, 제주도민, 생계를 위해 일본에 갔던 이들,
무고한 국민들 모두가 고문 끝에 간첩으로 둔갑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불법 연행, 구금, 고문, 조작 등 국가폭력으로
거듭되는 시민들의 저항과 민주화의 열망을 억눌렀으나

그러나
시민들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 운동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마침내 봄이 찾아왔습니다.

국가폭력은 시민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록되고 기억되었습니다.
국가폭력의 진상을 외면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마주 보았습니다.

사북항쟁은 노동자들의 소요사태가 아니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폭동과 내란이 아니며,
조작간첩은 말 그대로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삶은 개인의 고통어린 단면이 아닌,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면면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희생과 헌신의 교훈과 유산은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항구한 여정의
밑거름과 뿌리가 되었습니다.

#5월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사북항쟁 #간첩조작사건 #전두환 #신군부 #군사반란 #군사독재 #정당성 #합리화 #고문 #학살 #간첩조작 #국가폭력 #국가폭력피해자 #국가폭력피해생존자 #희생 #헌신 #민주화 #인권증진

[5.18 특집] 되찾은 봄이 계속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1980.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을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습니...
18/05/2023

[5.18 특집] 되찾은 봄이 계속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1980.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민주화를 위해 전두환과 신군부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을 투입해 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10.26 사태 이후 오랜 독재가 끝나자 시민들은 민주화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음지에서는 전두환과 하나회를 필두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광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정권의 합리화와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안보 위협, 불안, 공포를 조장했습니다.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규정, 국가폭력을 가했습니다. 5.18뿐만이 아니라, 1980년 4월 사북항쟁과, 전두환과 신군부 집권 간 만들어진 무수한 간첩조작 사건들이 그랬습니다.

5월 17일 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18일부로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를 발표,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 정문에 모여든 학생들을 구타 해산시켰습니다. 학생들은 금남로로 나아가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시민들이 동참하며 5월 19일부터 시위를 주도해나갔습니다. 계엄군의 폭력과 과잉 진압에 조직된 시민군은 저항 끝에 21일 계엄군을 후퇴시켰습니다.

5월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계엄군은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던 전남도청에 진입해 총공세를 가했습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시민군들이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폭도로 취급되어 끌려갔습니다. 이로써 열흘에 걸친 5.18 민주화 운동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북항쟁’.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약 한 달 전인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 사북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산노동자와 가족 6,000여 명은 사측과 어용노조의 횡포에 생존권을 위한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에 계엄사령부는 공수부대 투입을 고려했으나, 24일 노사정 간 합의가 원만히 이루어지며 상황은 일단락 된 듯 했습니다. 그러나 27일 계엄사령부는 정선경찰서에 합동수사단 현지수사반을 설치했습니다. 항쟁의 배후세력을 찾는다는 구실로 5월 6일부터 광부와 가족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해 고문과 폭력을 가했고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사북항쟁을 전면적 사회 개입의 단초로 삼았습니다. 사북항쟁은 광주 학살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동안 정권의 합리화와 안정을 위해, 시민에게 공포를 불어넣고 저항을 꺾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부재한 정당성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은 무구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수한 국가폭력이었습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위세를 등에 업은 보안사는 숱한 간첩조작사건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간첩조작은 승진과 포상의 기회였습니다. 보안사뿐만 아니라 안기부, 치안본부의 수사관들은 독재정권에 부응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서슴지 않고 무고한 국민을 적으로 규정해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사 간 불법 연행, 구금, 고문이 이루어졌고 짜 맞춰진 각본 속에 검찰 조사와 재판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권력에 통제되어 단지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일가족, 납북어부, 유학생, 재일동포, 제주도민, 생계를 위해 일본에 갔던 이들, 무고한 국민들 모두가 고문 끝에 간첩으로 둔갑되었습니다.

그렇게 전두환 정권은 불법 연행, 구금, 고문, 조작 등 국가폭력으로 거듭되는 시민들의 저항과 민주화의 열망을 억눌렀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에 대한 의지와 열망은 더욱 더 커져 나갔습니다. 수많은 민주화, 노동, 인권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봄이 찾아왔습니다.

국가폭력은 시민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록되고 기억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국가폭력의 진상을 외면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마주 보았습니다. 사북항쟁은 폭도들의 소요사태가 아니며, 광주 민주화 운동은 폭동과 내란이 아니며, 조작간첩은 말 그대로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삶은 개인의 고통어린 단면이 아닌,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면면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들의 희생과 헌신의 교훈과 유산은 민주화와 인권 증진을 위한 항구한 여정의 밑거름과 뿌리가 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전두환과 신군부가 집권해 가한 국가폭력의 모든 피해자들을 추념하며,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5월광주민주화운동 #사북항쟁 #간첩조작사건 #전두환 #신군부 #군사독재 #국가폭력 #민주화

사진 설명 및 출처 :
사진1.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위에 모인 시민들(출처 : 경향신문)
사진2.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 촬영하는 신군부 세력(출처 : 연합뉴스)
사진3.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출처 : 오마이뉴스)
사진4. 탄광노동자들과 가족들이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탄광 주변에 모여 있다.(출처 : 경향신문)
사진5.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교차로 '아!, 나의 조국'(출처 중앙일보)

[치유] 국가폭력 생존자회, 개야도를 방문하다.지난 5월 9일 오후 3시, 국가폭력 생존자회 회원들 12명과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전라북도 군산항에서 개야도(開也島)행 페리호에 올랐다. 군산항에서 배로 50분...
17/05/2023

[치유] 국가폭력 생존자회, 개야도를 방문하다.

지난 5월 9일 오후 3시, 국가폭력 생존자회 회원들 12명과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소장은 전라북도 군산항에서 개야도(開也島)행 페리호에 올랐다. 군산항에서 배로 50분 거리인 개야도에 거주하는 정삼근 선생(82세)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제주도 역사기행에서 강광보, 임문준 선생과 해후(邂逅)했던 생존자회 회원들은 연로한 국가폭력 생존자의 방문을 올해 주요사업으로 정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에서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차에 하원차랑 선생, 함주명 선생이 차례로 소천하자 마음이 공연히 바빠진 탓이다.

군산 개야도는 ‘간첩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작간첩사건의 피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던 섬이다. 정삼근 선생은 1980년대 조작간첩사건 피해 생존자이다. 거슬러 올라가 개야도 출신인 정삼근 선생이 납북되었던 것은 1968년이었다. 스물 다섯살의 선생은 어선을 타고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조기잡이를 하다가 북한에 끌려갔다. 5개월 만에 귀환하여 납북귀환어부가 되었지만, 반공법 위반으로 당시 징역 1년을 살았다. 어업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기에 이후에도 고기잡이를 하며 1남 5녀의 자녀를 키웠다. 그러던 중 1985년, 느닷없이 간첩 혐의로 또 붙잡혀갔다. 정삼근 선생은 처제 결혼식으로 군산 처갓집에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차에 실려 끌려간 것이다. 이후 보안대 고문에 못 이겨 수사관이 건넨 진술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 간첩 혐의가 되었고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뤘다. 그 기간에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좁은 섬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고 아이들은 '간첩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개야도 주민이었던 납북귀환어부 고(故)서창덕 선생의 사건을 뉴스에서 처음 들었을 때 정삼근 선생은 "뭐 할 짓이 없어 간첩질을 하냐"고 했었는데 딱 1년 후에 본인이 잡혀가고 보니 만들어진 조작 간첩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서 조작간첩 사건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분단 상황에서 북한과 대결하면서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건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유독 더 심해졌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학원 배후에는 간첩이 있다’라는 프레임으로 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광주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정삼근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납북어부 조작간첩사건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정삼근 선생은 2010년 재심을 통해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고 했다. 선생의 부인은 당시 행방불명이 된 남편을 찾아 2개월이 넘는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부인이 남편을 애타게 찾던 중, 빈집에 혼자 남아있던 큰딸(당시 17세)은 불쑥 찾아온 수사관들을 맞닥뜨린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네 아버지가 간첩이디."라며 온 집안을 뒤졌다. 딸은 충격을 받아 그만 실신을 했고 이후 정신 이상이 생겼다. 7년 후 출소한 선생이 병원에 데려가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으며, 지금도 데리고 살고 있다. 군산경찰서 타자수로 일하던 둘째 딸은 이내 해고됐다. 출소 뒤 자신이 간첩이 아니라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말조차 걸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억울함은 풀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악몽을 꾸는 일이 여전하다.

정삼근 선생은 반가운 얼굴로 선착장까지 생존자회 일행을 맞이하였다. 옥고를 함께 치룬 감방 동기도 있고 진실규명을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던 동료의 모습도 있다. 다리 부상으로 걸음이 못내 불편해 보였으나, 백발 가득한 선생의 표정에선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개야도 마을을 설명하는 선생은 일행을 언덕 위 자택으로 인도하였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자리한 일행은 선생의 삶을 때로 웃으며, 떄로 숨죽여 눈물지으며 듣는다. 80세가 넘은 선생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쉼 없이 쏟아내는 세월의 무게가 절절히 전달된다. 사건 당시 40대였던 선생은 그 세월을 견뎌내고 이제 80세 노인이 되었으나, 생존자회 회원들과의 만남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고통스럽던 시간을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남은 세월 자주 만나 회포를 풀자는 다짐도 한다.

이튿날 함께 개야도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정심근 선생은 개야도 노인회 회장이라고 한다. 일행은 노인 회관에 들러 개야도 주민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현재 학생이 2명만 있다는 초등학교를 지나 고즈넉한 해변에 도착했다. 일행은 바위 틈에서 바지락을 캐거나 언덕에서 나물을 캐기도 했다. 한때 국가폭력의 광풍이 지나간 개야도는 이제 한적하고 평화로운 섬으로 남아있었다. 해변을 뒤로 하고 산기슭을 느리게 산책하며 정자에 앉아 묵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느새 배가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일행은 선착장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진을 찍는다. 떠나가는 배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서있는 선생의 모습이 정겹고 뭉클함을 더하고 있었다. 6월에 서울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지만 일행을 떠나보내는 선생의 아쉬운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정삼근 선생은 재심 무죄로 누명을 벗었지만, '국가의 사과', '수사관 처벌', '남아있는 이들의 억울함을 알리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지금도 동네에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이를 돕는다고 한다. "억울하게 납북된 사람들, 지금까지 그 누명을 못 벗고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국민이 알아야 할 거 아니냐"면서 "나는 무죄를 받기는 했어도, 지금도 국가 사과를 받고 싶다.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잘못한 수사관들 제대로 처벌받게 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한다"는 말을 남겼다.

정삼근 선생을 수사했던 수사관은 현재 훈 포상이 취소되고 그 정보가 공개되었다.

"정삼근 선생님, 우리 모두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국가폭력생존자회 #국가폭력피해생존자 #정삼근 #개야도방문 #개야도 #간첩조작사건 #납북귀환어부 #전두환 #신군부 #국가의사과 #가해자처벌

[검찰은 재심을 원치 않는가?]지난 5월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조병구 부장판사)는 1960년대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故 오경무씨의 재심사건 첫 공판기일을 진행했습니다. 당초 검찰은 불법 구금이 의심돼...
15/05/2023

[검찰은 재심을 원치 않는가?]

지난 5월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조병구 부장판사)는 1960년대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故 오경무씨의 재심사건 첫 공판기일을 진행했습니다. 당초 검찰은 불법 구금이 의심돼 재심개시에 동의한다며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이날 공판에서 입장과 태도를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검찰은 당시 불법 체포나 구금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음 기일에 증거목록을 제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변호인 측에 따르면, 불법 구금 상태에서 작성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기에, 검찰의 의도는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증인으로 불러내겠단 것입니다. 변호인 측은 불필요한 증인신문과 반복될 절차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가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故 오경무 씨 형제들은 어떻게 간첩이 되었을까요?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1967년 6월 제주에서 감귤 농사를 짓던 오경대 씨 앞에 6.25전쟁 때 사라진 맏형 오경지가 불현듯 나타났습니다. 오경지는 일본에서의 취업을 빌미로 속여 오경대 씨를 일본이 아닌 북한으로 데려갔습니다. 납북 사건이었습니다. 오경대 씨는 며칠 뒤 풀려나 제주로 돌아왔으나, 오경지로부터 모친 살해 협박을 받아 서울 회사에서 재직 중인 형 故 오경무 씨를 불러내 오경지와 만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故 오경무 씨는 납북되어 40여일 간 사상교육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는 자수할 생각으로 회사 사장에게 얘기했으나 오히려 간첩으로 신고 당했습니다.

이 일로 오경대 씨와 故 오경무 씨의 다른 형제인 형 오경부 씨와, 여동생 오정심 씨도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 결과 오경무 씨는 사형, 오경대 씨는 징역 15년, 오경부, 오정심 씨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습니다. 1970년대 초 오경무 씨는 사형 당했습니다. 15년 동안 복역한 오경대 씨는 재판부가 불법 체포, 고문 등 불법 행위를 인정하고, 2020년 11월 26일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며, 재심 끝에 무죄를 확정 받았습니다. 53년 만에 누명을 벗었습니다. 오경대 씨는 형제들을 위해 재심을 진행할 생각을 품었고 故 오경무 씨와, 여동생의 재판은 바로 그러한 연유로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다음 재판은 오는 31일로, 공판준비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故오경무 #사형 #오경대 #오정부 #오정심 #간첩조작 #재심 #납북 #불법체포 #불법구금 #고문 #국가폭력

(기사 출처 :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30508000648, 뉴스핌)

[서울=뉴스핌] 배정원 기자 = 1960년대 북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집행당한 고(故) 오경무 씨에 대한 재심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조병구 부장판사)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

[동학농민운동을 기억하는 이유]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은부패정권에 저항하는 혁명이었으며,일제침략을 저지하는 전쟁이었습니다.이에 우리는 5월 11일을 기억합니다.지금처럼 19세기말 동북아 국제정세는 격변기를 맞습니다...
12/05/2023

[동학농민운동을 기억하는 이유]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부패정권에 저항하는 혁명이었으며,
일제침략을 저지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5월 11일을 기억합니다.

지금처럼 19세기말 동북아 국제정세는 격변기를 맞습니다.

청은 영국에 연달아 패배했고
일본은 미국에 강제로 개항했습니다.

그런데
조정은 매관매직을 일삼고
탐관오리는 수탈과 학정을 일삼았습니다.

1894년 2월 15일,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1,000여 명은 고부에서 봉기합니다.

두 달 만에 동학농민군은 10,000여 명으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합니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백성을 위한
집강소를 설치, 폐정개혁안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자들은
민중의 소리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조정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고,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텐진조약을 구실로 인천에 상륙합니다.

결국 백성을 위한 동학농민군의 희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조선의 민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울 때 조선의 권력자들은 없었습니다.

결국 조선은
10여 년 뒤,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습니다.
5년 뒤, 한일병합조약으로 일제에 병탄되었습니다.
36년의 일제강점 간, 전 국토와 국민이 일제에 짓밟혔습니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은 독재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고 이용했습니다.

이때도 민중들은 마치 조선 말기
부패정권에 저항했던 동학농민혁명처럼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희생했습니다.

부정부패에 저항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일제의 침략야욕에 대한 의병전쟁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독재정권기 민주화운동으로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5월 11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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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보다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의 삶을 위해]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계승해야 할까요? 숱한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과 기억 속에서 무엇을 교훈삼고 체화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후대에게 무엇을 가치와 ...
11/05/2023

[동학농민혁명, 보다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의 삶을 위해]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계승해야 할까요? 숱한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과 기억 속에서 무엇을 교훈삼고 체화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후대에게 무엇을 가치와 미덕으로 전해주어야 할까요? 과연 무엇을 승계하여 이로써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기 위해, 오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맞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의 부패정권에 저항하는 혁명이자, 일제의 침략야욕을 저지하는 전쟁이었습니다. 민중의 지역 연대를 통해 나타난 전국적 규모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조정의 무능과 일제의 무력에 좌절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와 패배로 일본은 거리낌 없이 침략의 마수를 뻗었습니다. 10여년 뒤 을사조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으며, 5년 뒤 한일합병조약으로 일제에 병탄되었습니다. 일제강점 36년. 전 국토와 국민이 일제에 짓밟혔습니다.

19세기 서양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동북아시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청은 영국에 연달아 패하였고, 일본은 미국에 강제로 개항하였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고종과 민씨 정권의 구태는 더욱 심해져 매관매직이 창궐하였고, 이로 인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은 백성의 피고름을 짜 제 배를 불렸습니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동학 접주인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교도와 농민 1,000여 명이 모여 고부 관아를 습격, 수탈과 학정의 상징인 만석보를 쳐부수었습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는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폭도로 규정, 고문하고 처형하는 등 탄압하였습니다. 4월 25일(음력 3월 20일)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4,000여 명은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고 무장에서 봉기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백산에 주둔하며 10,0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5월 11일(음력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고종과 민씨 정권은 체제의 모순과 무능으로 인한 민중의 저항을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하려 하였습니다. 후에 민영휘로 개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준을 중심으로 청군의 도움을 받으려던 그들의 행위는 청의 진군과 더불어, 텐진조약을 구실삼아 일본군이 조선 땅에 들어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군대가 주둔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조정과 전주성에서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습니다. 화약 조건으로 일종의 지방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안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7월 23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을 불법 점거,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10월 16일(음력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10월 말에 이르자 삼남 지방에 시작한 봉기는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일대까지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관군의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추가 파병까지 하여 진압을 주도하였습니다. 화력의 열세로 동학농민군은 무참히 쓰러졌고, 12월 7일(음력 11월 11일) 우금치에서 크게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 대부분이 붙잡혀 사형을 당하며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의 보다 더 인간된 삶을 누리겠단 열망과 정치적 주체로 나서겠단 의지는 일제의 침략야욕에 대한 의병전쟁, 일제 병탄 후 3.1운동, 항일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인권증진과 민주화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일제강점에 대한 독립운동으로, 군사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으로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유지를 위해 고문, 간첩조작, 학살 등 국가폭력을 자행한 군사독재정권은 그들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을 이용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우금치에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설을 지원하며 5.16군사정변과 유신체제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1983년 황토현 기념관을 세우고, 친일 조각가 김경승으로 하여금 전봉준 동상을 조각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분노한 시민들은 위령탑 비문에 새겨진 ‘유신’, ‘박정희’ 등을 파버렸고, 2021년 김경승이 조각한 전봉준 동상을 철거, 지난해 새로이 ‘불멸, 바람길’이란 이름의 동학농민군의 행렬을 조각한 동상을 건립했습니다. 군사독재의 정당화나 합리화를 위한 역사적 이용이 아닌, 보다 더 인간된 권리와 정치적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동학농민군의 진정한 바람을 오늘날에도 이어 후대에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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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라는 커튼 뒤에 숨어있는 가해자들]“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며, 외...
10/05/2023

[‘공소시효’라는 커튼 뒤에 숨어있는 가해자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며, 외면했습니다.”

20년 전, 고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 처절하게 외쳤던 말입니다.

이 외침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적용되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지난 월요일 오후 2시, 국회에서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그 토론회는 [국가폭력 범죄의 공소시효 배제 입법화]를 위한 논의의 자리였습니다. 토론회는 무려 3시간이 넘게 진행되었고, 주최의원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진성준 의원과 주최는 아니지만 현장에 참여했던 강민정 의원은 모든 순서가 마칠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20여 년 전 목놓아 외쳤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외침이 가슴을 치는 듯했습니다.

어떻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고문을 조작해 한 사람의 목숨과 그 가족들의 삶을 망가트린 고문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현행법 체계는 공소시효라는 법으로 이들을 보호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아직도 공소시효 배제 입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양성우 변호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국가폭력 범죄 공소시효 배제를 위한 입법은 총 5차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4차례가 이번 21대 국회였습니다.

특히, 지난 2022년 11월 28일 발의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은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였던 박홍근 의원을 포함해 무려 168명의 의원들이 공동발의했음에도 여전히 국회 통과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 특히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엄성 회복의 과정이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가해자 처벌은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이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공소시효라는 법의 커튼 속에 숨어 안녕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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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토요일 14시,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 열리는 함세웅 이사장님의 강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김근태기념도서관은 올해 인권 및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며, 책의 저자와 함께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존엄과 용기에 대...
10/05/2023

5월 13일 토요일 14시, 김근태기념도서관에서 열리는 함세웅 이사장님의 강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김근태기념도서관은 올해 인권 및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며, 책의 저자와 함께 책과 이야기를 나누고, ‘존엄과 용기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토요일,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님이신 함세웅 신부님은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저서로 참가자분들과 책과 이야기를 나누실 예정입니다.

제목 : 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다
강사 : 함세웅 신부님(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이사장)
일자 : 5월 13일 토요일 14시
장소 : 김근태기념도서관 공간, 마루(2층 다목적 강당)
참가 : 인권·인문학 강좌에 관심있는 누구나 참여 가능
신청 방법 : 도봉구통합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신청 및 구글신청서 접수
https://forms.gle/LyVAgnCN3Vev6JRx7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는 한국현대사와 민주화운동에 관한 52편의 글을 담은 책입니다. ‘조선건국위원회’부터 시작해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와 민주화운동의 굵직한 사건들을 조명합니다. 이 책을 통해 함세웅 이사장님은 자전적 체험을 붓글씨와 역사기도로 해방에서 촛불까지 증언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함세웅 이사장님과의 만남을 통해, 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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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김근태기념도서관 인스타그램)

[검찰은 재심 청구 기각을 주장했습니다]故 한삼택 씨의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월 수사관들의 고문에 의...
09/05/2023

[검찰은 재심 청구 기각을 주장했습니다]

故 한삼택 씨의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월 수사관들의 고문에 의해 故 한삼택 씨가 허위 자백을 한 사실을 인정하며, 진실규명 결정 및 재심을 권고했습니다. 조사 결과 법원은 1970년 10월 8일 구속영장을 발부했지만, 故 한삼택 씨는 9월 29일부터 불법 구금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진행된 4월 14일 서울중앙지법 재심 첫 심문에 검찰은 재심 청구 기각을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구속영장 발부 전 구금된 사실에 대해 “자료가 잘못됐을 수 있다.”, 故 한삼택 씨의 자녀, 조카의 진술에 대해 “추측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검찰은 사건이 50년 이상 경과해 경위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故 한삼택 씨의 유가족은 고인의 피해와 명예 회복을 바라며 52년이 지났어도 재심을 요청했습니다.

#故한삼택 #고문 #간첩조작 #재심청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화해위 #52년 #검찰 #재심청구기각주장

(기사 출처 : https://www.news1.kr/articles/5015796, 뉴스1)

(서울=뉴스1) 김근욱 기자 | 경찰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간첩 누명을 쓴 고(故) 한삼택씨의 재판이 52년만에 다시 열렸지만 검찰이 재심 개시에 반대하고 있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23단독 양진호 판사...

사형 확정 후 집행까지,18시간.1일도 지나지 않아 8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었습니다.18년.5.16 군사정변에서 10.26 사태까지 박정희...
08/05/2023

사형 확정 후 집행까지,
18시간.

1일도 지나지 않아 8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었습니다.

18년.
5.16 군사정변에서 10.26 사태까지 박정희와 추종자들이 집권한 기간입니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꺾기 위해 그들은 무고한 국민을 대상으로 ‘인민혁명당 사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담당 검사들의 기소 거부와 언론의 고문 및 조작 폭로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1974년, 반유신체제 운동을 꺾기 위해그들은 다시 10년 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불과 10년 사이 사법부는 그들의 수족이 되었고, 언론은 통제되었습니다.

그 결과,

1024명이 조사받고,
180명이 구속·기소됐으며,
23명의 피고인 중
8명이 사형을 받았고,
남은 이들도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독재정권은 정권의 유지를 위해 국민을 적으로, 죄인으로 규정했고 국가폭력에 가담한 추종자들을 국민 위의 국민으로 정했습니다.

국가권력의 충동에 의한 폭력적 추동을 막고 되풀이되는 역사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간첩조작과 국가폭력에 가담한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합니다.

18시간과 18년.

“누가 국민의 적이며,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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