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2026
성숙의 불씨 제995호: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 - 김도식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언어 문제로 고생하는 일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이발하러 갈 때이다. “앞머리는 다듬어주시고, 귀는 나오게 해주세요. 뒷부분은 바짝 깎아주시고요.”를 현지 언어로 표현하려면 한숨부터 나온다. 미국 유학 시절 초반에는 차도 없었기에 선배가 추천해 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이발소를 다녔다. 영어를 잘하는 룸메이트에게 이발소에서 쓸 수 있는 간단한 영어 표현을 배워가기는 했지만, 원하는 내용을 정확하고 세세하게 표현할 능력이 없기에 늘 주인장의 처분을 기다리곤 했다. 마치 실험 대상이 된 듯한 내 머리를 쓸쓸하게 바라보며, 이런 서비스에 팁까지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단한 희소식임이 틀림없었다. 가격은 이전에 다니던 이발소에 비해서 조금 더 비쌌지만, 마음에 드는 머리를 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면 기꺼이 낼 용의가 있는 정도의 비용이었다. 그 미용사는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헤어스타일을 아는 분이었고, 서양인과는 다른 두꺼운 직모를 다룰 줄도 알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과는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장점이었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이발소보다는 미용실이 비쌌기에, 그 가게를 알고 나서는 학업을 마칠 때까지 계속 그곳을 애용했다.
어느 날, 미용실에서 이발하고 있는데, 어떤 미국 할머니가 파마를 마치고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나 너무 멋지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파마한 머리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빈말을 못 하는 성격의 소유자라서, 아내가 머리를 하고 와도 진짜로 예쁘지 않으면 예쁘다는 말은 안 하는 속 좁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솔직히 그 할머니의 파마가 그렇게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이 못마땅해서, “멋있다”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즉답을 회피하는 것뿐이어서, “제가 지금 안경을 쓰지 않아, 잘 안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당황한 것은 할머니만은 아니었다. 한국인 미용사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쩔 줄 모르다가, “안 보이는 사람에게 물어보셨군요!”라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였다. 그 할머니의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한 마디로 그분의 좋았던 기분을 제대로 망가뜨렸음이 틀림없었다.
사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이 생각난다. 그냥 “멋있다”라고 한마디 해주면 되는데, 그게 뭐 그리 힘들었는지…. 아니면 한술 더 떠서 “30년은 젊어 보인다”라고 조금은 과장된 말을 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편협했던 내 성격은 그 할머니의 기분을 망쳤을 뿐 아니라 어쩌면 동양인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지금 살아계실지는 모르지만, 만날 수만 있다면 “그때 죄송했다”라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말 한마디면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는데, ‘멋있다’라는 한마디를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에 여유가 없기도 했고 내 시각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 심보가 못나서 그랬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정확함을 중시하고 모든 걸 비판적으로 보려는 습성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설령 학문적인 부분에서는 이런 점이 중요하더라도 인간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정확해야 할 때와 여유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인간관계에서 가능한 한 부정적인 단어 대신 긍정적인 표현을 하려고 연습했다. 선물 받은 물건이 내 취향이 아니어도, “와~ 아주 마음에 든다.”라고 반응하고, 도저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때면, “나 이런 것 필요한 줄 어떻게 알았어?” 또는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확실히 나의 인간관계가 더 나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즘도 학생들이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러 종종 찾아오는 것을 보면 예전보다는 말로 상처를 주는 빈도가 줄어든 것 같았다.
이처럼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떠올리면서, 옛날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나를 발견하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의 못난 나를 꺼내는 작업은 민망하지만 그래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위로를 준다. 그러면서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성숙한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글쓴이 / 김도식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