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8/2026
권한이 많지 않다면 주민은 어디로 가야 하나
대전에서 마주한 송전탑 갈등의 현실
"송전탑과 절연!" 참가자들이 우산을 펼쳐 들고 송전탑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퍼포먼스를 마친 이들은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길 위에 섰다. 폭염경보가 내려진 6일 오전, 대전 유성구청 앞은 뜨거운 햇볕만큼이나 결연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해남에서 출발해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거쳐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용인반도체산단 재검토 송전탑 반대 전국대행진'이 이날 대전에 도착했다. 전체 여정의 3분의 1을 걸어온 참가자들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해남에서 출발한 이들의 발걸음은 송전탑 하나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 개발을 위해 지역을 희생시키는 국가 에너지 정책의 근본을 다시 묻기 위함이다.
행진은 시작부터 작은 마찰을 겪었다. 유성구청 직원들이 청사 앞마당에 모인 참가자들에게 청사 밖으로 이동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잠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참가자들은 "잠시 출정식을 진행한 뒤 출발하겠다"고 설명했고, 구청 측은 청사 안에서의 집회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큰 충돌 없이 상황은 정리됐고, 참가자들은 송전탑과 절연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대전 도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출발에 앞서 안재훈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해남에서부터 함께 걸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지역을 전기를 공급하는 희생지로 만드는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꾸기 위해 끝까지 함께 걸어달라"고 말했다. 그는 "송전탑 문제는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 정책과 국토 이용 방식의 문제"라며 전국적인 연대를 호소했다.
문성호 대전충남녹색연합 공동대표도 행진단을 향해 "대전에서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서울까지 함께 걸으며 주민들의 목소리를 알리겠다"고 말했다. 30여 명의 참가자들은 유성구청을 출발해 한밭대로를 따라 서구청까지 1시간 30분가량 걸었다. 폭염 속에서도 걸음은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면서도 손에 든 깃발은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송전탑 백지화", "주민 의견을 반영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을 걸었다.
행진단이 도착한 서구청에서는 전문학 서구청장과 대전송전탑백지화주민대책위원회, 전국대행진 참가자들이 간담회를 열었다. 주민들은 무엇보다 입지선정위원회의 대표성과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김재용 대전송전탑백지화주민대책위원장은 "구청과 동 행정복지센터, 통장을 거치는 과정에서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 입지선정위원이 선정되고 있다"며 "이런 방식으로는 주민 대표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는 주민대책위가 추천하는 주민들이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옥경 대전송전탑백지화주민대책위원장도 "우리 마을은 주택에서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송전선로가 지나갈 수도 있는데 주민들은 입지선정위원회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며 "주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송전탑을 막으러 다니게 할 것이 아니라 대전시와 서구가 별도의 대응기구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서구청이 입지선정위원회가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과 중앙정부, 한국전력에 주민들의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전문학 서구청장은 주민들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도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사업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많지 않다는 취지로 답했다. 개인적으로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구정을 책임지는 위치에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답변이 이어지는 동안 회의실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주민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주민들은 "주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지방정부마저 권한이 많지 않다고 한다면 주민들은 어디에 호소해야 하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다만 전문학 구청장은 입지선정위원회 구성 과정에서 주민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살펴보겠다고 답했다. 주민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지방정부가 주민들의 목소리를 중앙정부와 한국전력에 보다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대전에서는 모두 다섯 개의 송전선로가 검토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세 개 노선은 이미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서구는 가장 많은 노선이 검토되는 지역이다. 주민들은 지금이 노선 변경이나 사업 재검토를 요구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시기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와 한국전력을 상대로 주민 의견을 전달하고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전송전탑백지화대책위원회는 이날 전문학 서구청장에게 주민들의 요구를 담은 입장문을 전달하고 공식적인 답변을 요청했다. 주민들의 문제 제기는 지방정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단지 송전탑 하나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기후위기 시대 국가 에너지 정책의 방향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부는 기후위기를 이유로 에너지 전환을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초고압 송전망을 확대하고 있다. 전력 수요를 줄이는 정책보다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더 먼 거리까지 보내는 방식에 의존하는 정책이 과연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방향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비롯한 대규모 산업단지는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필요로 한다. 그 부담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산과 들, 마을이 떠안고 있다. 송전선로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가로질러 가슴에 구멍을 내고 있다. 발전소와 송전시설은 또 다른 환경 부담을 낳고 피해는 주민에게 전가된다. 기후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분은 사라진채 새로운 환경 갈등만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력 소비를 줄이고 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지역에서 사용하는 분산형 에너지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책은 초고압 송전망을 계속 확충하는 중앙집중형 전력 시스템을 유지한 채 산업단지 개발만 앞당기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발전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인 것을 정부는 간과하고 있다.
대전에서 주민들이 외친 "송전탑을 멈춰 달라"는 요구는 결국 개발을 위한 희생을 더 이상 지역에 떠넘기지 말라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송전탑이 아니라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지역이 함께 지속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정책이라는 것이 주민들과 행진단의 공통된 주장이다.
간담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다시 배낭을 메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7일 행진은 유성월드컵경기장에서 다시 시작된다. 해남에서 시작된 걸음은 아직 청와대에 닿지 않았다. 주민들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기후위기를 말하면서도 더 많은 송전탑과 더 많은 전력 소비를 전제로 한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으로 나아갈 것인지의 선택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전국대행진은 바른 선택의 길을 걷고 있으며, 북쪽을 향해 걷고 또 걸어 바른결말을 낼 것이다. 2026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