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026
큰 일을 하려하지 말고
큰사랑으로 일하십시오
최선의 적은 최악이 아니라 차선이다
최악에 빠져 최선을 잃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차선에 매료되어 그만 최선을 놓치는 치명적 우(禹)를 범하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
1. 사랑은 언어의 마술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랑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쉬운 것으로 우선 언어와 관련된 재능들을 지목합니다.
지난 독일 월드컵 중계를 잘해서 어떤 사람은 확실히 뜬 반면 어떤 사람은 말 몇 마디를 잘못해 도중하차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말 잘하기로 유명한 모 방송의 유명한 시사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는 모대학의 전임교수로 발탁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러브 콜을 받고 있습니다.
언어의 마술을 사랑을 위협하는 위험대상 1호로 지목합니다. 언어의 마술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라고 경고합니다. 말재주보다 사랑의 능력을 더 소중히 평가하는 의식의 대전환이 우리에게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랑은 다양한 재능의 총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쉬운 두 번째 목록으로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지식의 소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듭니다.
'내가 이런 재능들을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는 성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로 도전적인 고백입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물량적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인물은 그 목표를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재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잣대로 성공의 질을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량적 성공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왜곡된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성공의 질을 평가하려는 것은 성공에 대한 시기의 발로일 뿐이요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려는 비겁한 짓일 뿐입니다.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재능일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재능과 사랑을 겸비한 사람을 선호한다는 원리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선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실제론 사랑보다 재능을 더 선호하는 이중적인 자신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첫째가 재능과 사랑을 겸비한 사람, 둘째가 재능은 부족해도 사랑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재능은 있어도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예 존경대상이나 선호대상이 되서는 안됩니다. 치유대상입니다.
3. 사랑은 구제와 헌신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랑의 중심적 위치를 위협하는 세 번째 목록으로 놀랍게도 구제와 열정적 헌신을 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눠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행위입니까? 그러나 그런 놀라운 구제행위에도 사랑이 결여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희생적인 구제행위도 결국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 위해 계산된 이기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속기 쉽습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위하고자하는 진실한 마음만이 기부행위의 유일한 동기가 될 때 기부행위는 비로소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라도 거기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모두 헛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최고로 중요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있습니다. 또 시대마다 특별히 매력을 끄는 사랑의 모양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한 때 CF에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글귀가 등장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끈 적이 있었지요. 사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 적이 많습니다.
1.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사랑을 정의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좀 기운이 빠지는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먼저 낭만적이 생각이 떠오릅니다.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시라노』라는 작품이 있지요. 젊은 장교 그리스티앙이 미녀 록산느를 사랑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말과 글에 전혀 재주가 없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음악가요 당대의 뛰어난 검객인 선배 기사 시라노에게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시라노도 먼 친척인 록산느를 마음으로부터 깊이 사랑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코가 기형적으로 너무 컸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습니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록산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아름다운 편지를 써줍니다. 록산느는 그 글이 크리스티앙의 것인 줄 알고 그에게 폭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둘이 직접 만나는 시간이 왔습니다. 록산느는 사랑의 눈길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며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크리스티앙은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 입을 열어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록산느는 '아, 그건 내용이고 표현을 해주세요'라고 말하죠. 더욱 당황한 크리스티앙은 어쩔 줄 모르다가 거의 화가 난 듯이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내 뱉듯이 말합니다. 여전히 실망한 록산느는 '그건 좀 낫네요'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에게 사랑은 매력적인 사람을 향한 달콤하고 열렬한 감정입니다. 그런 사랑을 보통 에로스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에로스적 낭만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요즘 말로 말하면 비호감의 대상까지 사랑합니다.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란 점을 분명히 하는 대목입니다. 현실 속에 있는 사람 치고 내 맘에 항상 쏙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호감이 가는 사람일지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느 구석엔가 실망스럽고 호감이 안가는 약점, 심지어는 혐오감이 드는 부분마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은 참되 오래 참는다고 말합니다.
2. 사랑은 고통을 오래 견뎌내는 능력입니다
내가 사랑해왔던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하면 마음에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진정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에로스 사랑은 그런 고통을 오래 견뎌내지 못합니다.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워주는 동안만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자기를 만족시켜주었던 것들이 자신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에로스는 견디지 못합니다. 권태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에로스를 받아주지 않을 때 깊은 상처를 받고 어둠 속에 빠집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미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상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무관심으로 도피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에로스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고통을 오래 견뎌냅니다. 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거나 방어하려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자기 가슴을 파고 들어와 송곳으로 찌르듯 괴롭힐 수 있도록 자기를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상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는 오래 참음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할 때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가 유산을 싸들고 아버지와 집을 등지고 먼 나라로 휙 가버렸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빈둥지 증상이란 것을 아시죠? 자녀가 장성하여 결혼하여 분가해갈 때 부모가 느끼는 허전함과 외로움의 고통을 말합니다. 하물며 이렇게 집을 나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아들이 재산을 홀라당 까먹고 빈 털털이가 되어 망가진 몸으로 투벅 투벅 집으로 기어들어 옵니다. 그 초라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나이도 잊은 듯 달려갑니다. 그를 뜨겁게 포옹하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어주고 새 신발을 신기고 대대적인 환영잔치를 벌입니다. 기쁨을 감추질 못합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마음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주고 간 고통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뼈아픈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견뎌낸 것입니다. 그 고통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깨뜨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실했던 자신을 위해선 아주 작은 파티도 열어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하여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항의는 논리적으로 합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종종 형식적인 논리에 있지 않고 가슴에 담겨 있습니다. 형은 동생이 남기고 간 고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은 형의 마음속에 있던 동생을 향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을 열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 나도 제법 사랑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흐뭇해할 수 있습니다. 착각입니다. 물론 그런 사랑도 나름대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가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에로스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가페 사랑의 진정성은 탕자처럼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낼 수 있는가, 로만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힘만으로 위와 같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성격과 의지력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요. 선천적으로 성격이 급하고 의분심이 강한 사람에겐 화가 치밀어 오르는 한 순간을 견뎌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은 물을 쏟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화를 내는 그 순간에 벌써 후회하지만 화를 고스란히 다시 거둬 담아 원상태로 복귀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 참는 성격을 가진 사람도 가만히 보면 겉으로 감정만 들어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상대방을 마음에서 접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친절합니다.
아가페 사랑의 첫 번째 특성으로 오래 참음을 들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주는 고통을 단순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견뎌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기꺼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상대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직감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참는 사랑의 진정성을 좀더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친절입니다.
1. 친절함의 뜻
친절함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을 대하거나 보살피거나 가르쳐 주거나 하는 태도가 정답거나 따뜻하거나 자세하거나 하여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상태에 있는 것. 또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에로스가 베푸는 쉬운 친절과 아가페가 베푸는 어려운 친절입니다. 이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에로스는 쉬운 친절을 베푸는 열정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물론 그런 친절마저 충분하게 베풀지 못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받은 만큼 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나에게 이런 저런 유익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만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보단 훨씬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나의 이상형으로서 나의 애인이 되어 주었으면 딱 좋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어렵습니까? 너무 즐겁죠! 비속에서 3시간을 기다려도 마냥 행복합니다. 돈 많고 내 장래, 내 사역 혹은 내 사업을 책임져줄 용의가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어렵습니까?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도 보니까 다른 나라들의 원수를 똑 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일본의 현직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면 아주 각별한 친절을 베풉니다. 자기 목장으로 데리고 가 아주 친밀하게 교제를 합니다. 일본을 방문할 땐 자기 이름이 새겨진 카우보이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쉬운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 사랑입니다. 물론 에로스 사랑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 에로스 사랑마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해지겠습니까? 에로스 사랑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자아발전과 성취를 위한 노력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해줍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입니까? 사실 인간이 창조한 문화의 상당부분이 그런 동기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에로스를 아가페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에로스에 만족하지 않고 아가페로 더 성장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가 아가페로 보완되지 못하면 에로스는 본래의 아름답고 화사한 향기를 잃고 악취를 풍기고 심지어 독을 뿜어내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에로스가 거부당하거나 상대에 대한 환상이 깨어질 때입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에로스는 결국 자신과 상대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대부라는 3부작 영화를 기억합니까? 아버지 말론 브란도의 대를 이어 대부가 된 알파치노는 자신의 친형이 자신과 그룹에게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서자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간접 살해합니다. 잔인의 극치죠. 그러나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딸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합니까? 자기 아들이 출연한 오페라를 감상하고 나오다가 극장 계단에서 자기 딸이 자기 대신 경쟁조폭의 총에 맞아 죽자 오열합니다.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실 알파치노는 그 동안의 모든 잔인한 행동들을 자신과 가족과 그룹을 위한 행동으로 정당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던 자신의 딸이 죽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에로스적 친절을 아가페적 친절로 착각해선 안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쉬운 친절은 세리, 이방 사람, 죄인들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적용하자면 일본의 앞잡이, 일본 사람, 각종 범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쉬운 친절을 베풀곤 자기 만족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쉬운 친절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임을 다니다보면 서로 마음이 잘 맞고 성격과 취향이 쉽게 통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열심히 베풀면서 자신에게 아가페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면 그 순간 성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런 친절만 열심히 베풀고 더 나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 수준은 일본 앞잡이, 일본사람, 범죄자 수준이구나!' 제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리죠? 그래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에로스적 친절을 아가페적 친절로 착각하는 것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3. 아가페는 어려운 친절을 베푸는 능력입니다
어려운 친절이란 친절을 별로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첫째, 세상적으로 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에로스적 친절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면 아가페적 친절은 나의 밖에서 오는 능력을 경험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아가페의 능력을 경험하면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여러 사회적 소자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둘째, 어려운 친절이란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입니다. 이는 첫 번째 친절보다도 더 어려운 친절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에겐 원수를 갚아 복수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특징으로 오래 참음과 친절을 들었습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사랑이 하지 않는 8가지를 제시합니다.
이 8가지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많은 슬픔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능력이 우리 자신 안에는 없습니다. 사랑의 위대함이란 바로 우리를 8가지 굴레에서 해방시켜주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8가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발견하고 그 능력을 덧입는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선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생각해봅시다.
1. 시기의 뜻
시기는 두려움과 상실의 고통입니다. 시기는 단순히 부러워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승엽 선수가 최근에 전세계에서 세 번째로 30대 이전에 홈런 400개를 날리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일반 시민들에겐 부러워할 일은 되어도 시기할 일은 못됩니다. 그러나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거나 그를 뛰어 넘고 싶은 동료야구선수들에겐 시기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승엽 선수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가 팬들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제3의 존재가 나타나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나에게서 빼앗아 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때 갖게 되는 상실과 배제의 고통입니다. 이런 시기는 에로스 사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시기를 동반합니다
에로스란 자신의 필요에서 비롯되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피차 독점적 관계를 누리고 싶어하는 열정입니다. 상대의 어떤 부분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둘이 완벽하게 하나되고 싶은 열망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 사이에 끼어 들어 상대의 일부분이라도 가져가려고 하면 나는 두려움, 상실과 배제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끼여드는 사람에 대하여 미움과 증오를 갖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의 총체가 바로 시기입니다. 에로스 사랑을 하려면 언젠가 이런 시기와 맞닥뜨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젊은 남녀들은 종종 환상적인 사랑을 꿈꿉니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결혼하여 언제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다가 무덤까지 그 사랑을 갖고 가는 그런 낭만적인 꿈 말입니다.
아무리 이상형이라고 해도 살아 보면 약점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조만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고 상대 외에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시기심을 작동시키는 순간입니다. 옛날엔 그 지점에 이르는데 대강 3년은 걸린다는 통설이 통했는데 요즘은 신혼의 유효기간이 아예 없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원한다면 남녀사랑을 아예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시기는 단순히 남녀사이의 애정에만 동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정에도 동반될 수 있습니다. 나와 절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절친하게 지내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친구를 뺐길 것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시기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하나일 때 그 자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죠. 어머니의 사랑이 분산됩니다. 엄마 젖은 동생의 독차지가 됩니다. 아무래도 엄마의 관심과 애정은 어리고 약한 동생에게 더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형, 오빠, 언니, 누나가 느끼는 고통이 바로 시기입니다. 그 시기는 급기야 부모가 보지 않을 때 동생에게 다양한 해코지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꼬집고 때립니다. 매우 귀찮게 굽니다.
그러면 시기 자체가 죄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에로스는 우리 자신을 계발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을 제공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합니다. 지나치지만 않으면 시기심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에로스를 피어나게 하는 원천이요 그를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줍니다.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해서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는데 내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혼과 가정은 근본적으로 파산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기가 언제 문제가 됩니까? 적절한 수준을 넘어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을 때입니다. 변심하고 배신한 배우자를 증오하고 그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시기심이 커지면 파괴적이 된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일체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나에게만 절대적으로 묶어 두려고 한다면 시기심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전한 것이겠죠.
3. 아가페는 시기를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아가페는 시기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가페는 시기심이 적절한 경계선 안에 머물어 있어 긍정적인 역할만 하도록 통제해줍니다. 아가페는 시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와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에 항상 최선을 원합니다. 그가 잘되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나의 행복입니다. 그가 잘됨으로 내가 소외된다고 해도 그 행복이 나의 상실의 고통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가장 강한 욕망 중에 하나일 겁니다. 게다가 요즘 대중문화는 자기 자랑을 일종의 미덕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에 능한 사람은 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
그럼 모든 자기 자랑은 아가페 사랑을 거스르는 행동일까요?
1. 아가페 사랑이 인정하는 자기 자랑
에로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그런 자기 자랑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며 부디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빌어주죠. 물론 연애의 고수 중에는 그 반대로 접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비밀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오히려 상대방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것이죠. 그것도 방법만 다를 뿐 자기 자랑의 일종입니다. 연애감정에 가볍게 휩싸이지 않고 자기를 냉정하게 통제할 줄 아는 무게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셈이죠. 아가페는 그런 자기 자랑도 귀엽게 봐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아가페 사랑이 피하는 자기 자랑은 어떤 것일까요?
2. 아가페 사랑이 피하는 자기 자랑
자기 자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선을 넘어설 때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실제보다 과장하거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을 넘어서게 만드는 것은 에로스적 욕망 즉 남의 시선을 나에게 지나치게 붙잡아 두고 싶은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이 산만하고 부주의해서 나의 훌륭한 점을 주목하지 못할까봐 안절부절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훌륭한 점을 보고도 안목이 없어서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아가페 사랑과 함께 가는 자기 자랑에는 그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 슬퍼하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나의 장점에 대하여서 조차 사람들이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줄 날이 오겠거니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지나치게 연연해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러나 에로스의 한계 내에 갇혀 버리면 방금 말씀드린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교묘하게 오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취향과 형편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 혹은 상징물들을 사용합니다.
말을 잘하거나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탁월함을 증명할 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습니다. 듣는 사람들의 반응과 관계없이 쏟아지는 각종 무용담이 거기에 속합니다. 풍부한 재물을 소유한 사람들은 초고가 물품을 자랑거리로 애용합니다. 요즘 '신 제트 족'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더군요. '제트 족'은 과거 여행사의 제트여객기를 이용하여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한 반면, '신 제트 족'은 자기 소유 제트기 혹은 전용 제트기를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물보다 장식용 보석이 왜 그렇게 비싸야하는지 경제학자들이 처음엔 잘 설명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가격은 재화의 본질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석의 공급량은 희소한데 반해 보석을 자랑거리로 삼고 싶어하는 인간의 수요는 엄청나게 강렬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부동산가격도 이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최근 건교부에서 공개한 아파트 실거래 가격을 보니까 강북과 강남의 가격차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어떤 분이 농담으로 말씀하시긴 했지만 강북에 아파트를 소유했다고 해도 강남 기준으로 하면 무주택자라는 표현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자동차, 학력,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자기 자랑의 상징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3. 아가페 사랑은 왜곡된 자기자랑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자랑과 교만은 아주 가까운 사촌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둘 다 자기가 삶의 무대 중심에 서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자기자랑은 자신의 이미지 강화에 목적이 있다면 교만은 힘과 권력 장악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교만 역시 자기자랑 못지 않게 인간의 심성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입니다. 교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남보다 탁월하다는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우월감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들입니다.
교만엔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한 열망의 표현이지만 교만은 우리의 삶을 매우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암을 자각하지 못하듯이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답답한 것은 그 딜레마를 발견한 다음에도 우리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실로 교만은 최고의 명의에게 치료받아야할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아가페 사랑엔 바로 그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만의 정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사랑이 어떻게 교만의 질병을 치료해주는지 배울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1. 교만의 정체
교만은 건강한 자존감과는 구별됩니다. 건강한 자존감이란 자기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여 받아들이고 진솔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필요이상으로 폄하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할 때도 평정심을 잃거나, 상처받거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소위 자존심과 구별됩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이 나를 내가 생각하는 바보다 낮게 평가할 때 상처를 입고 분개심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교만과 구별되지만 자존심은 교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적 차원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상대적 결여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칭송과 인기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자신의 아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최고 절정에 이른 사람들이 종종 자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저런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이유는 인간의 교만과 치열한 경쟁심을 바탕으로 한 경제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적절한 경쟁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그 안에 경쟁을 무한대로 확장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FTA보다 한미 FTA가 더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지구상의 어떤 자본주의보다도 더 강력하게 경쟁과 승자독식, 효율의 극대화에 다른 중요한 가치를 종속시켜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교만과 경쟁심을 끝없이 자극하여 결국 파국에 이르게 합니다.
교만과 끝없는 경쟁은 인간을 결국 적대적인 존재로 만들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나 외의 모든 사람을 잠재적 경쟁대상으로 둔갑시킵니다. 다른 사람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 고독에 시달립니다. 교만한 사람은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다는 확신에 금이 가지 않도록 자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호수에 품위 있게 떠 있는 백조 같을 때가 많지요. 물위에 유유자적 떠 있는 것 같은 데 사실은 물 속에서 발을 쉼 없이 움직이고 있지요. 자기 스스로를 망가트릴 정도로 지나치게 바쁜 사람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동기가 성실과 충성에 있는가 아니면 경쟁심인가?
교만의 교묘함은 스스로 인지하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교만은 좋은 일들을 가능하게 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일에 자신의 눈이 멀어 그만 그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교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맹장염 치료를 받고 대장암을 얻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고 좋은 일을 할 때, 교만이 틈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이 교묘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은 쉽게 발견하고 아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은 무척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아주 흥미로운 자가진단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이나 싫은 마음이 드는가?' 싫은 마음이 강한 만큼, 꼭 그 만큼 나의 교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 정말 정확한 진단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모임에서 거물급 인사로 행세를 하는 것이 불쾌하고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바로 그 거물급 인사인데 라는 자기 확신에 상처가 갖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하는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교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아가페 사랑은 교만을 이기게 하는 능력
아가페 사랑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그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을 극복하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만이 사랑 앞에서 결정적으로 부서지는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 겉을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은 죽여도 죽여도 마치 불사조인양 변형된 모양으로 다시 살아 돌아옵니다. 일생동안 교만과 싸울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인간을 괴롭히는 다양한 문제들의 가장 근본적인 해답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랑을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절망과 낭패감만 더 깊어져 힘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매우 유익한 호전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과 자만심의 고질병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은 무례함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그와 관련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무례함은 앞서 살펴본 자기자랑, 교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셋은 자기가 무대의 중심에 서야된다는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그 욕망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자랑은 자기의 이미지 강화를 추구합니다. 교만은 힘과 권력의 획득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무례함은 남을 무시하고 눌러버림으로 상대적으로 자기의 위상을 높이려는 전략적 행위입니다. 그럼 무례함의 정체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사랑이 어떻게 무례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 무례함의 정체와 위험성
무례함은 단순히 예의가 없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원하지만 어떤 것이 예의바른 것인지 몰라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어린 사람이 윗사람과 대화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대화 중 자기보다는 나이가 많거나 자기가 높여야할 처지에 있지만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윗사람보다는 어리거나 낮은 위치에 있는 제3의 인물을 언급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 때 그 제3의 인물에 대하여 존칭을 사용해야될까요 하지 말아야할까요?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윗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윗사람인데 존칭을 사용하지 않으려면 뭔가 켕기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법을 잘 모르면 그만 존칭을 사용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실수를 무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고의적으로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누르려는 의도나 자기를 높여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아주 예의바르게 언어를 사용하고 행동해도 사실은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무례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월드컵 축구 프랑스와 이탈리아 결승전 경기 중 지단이 마테라치를 머리로 들이받아 경기장에 눕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최근 축구장에서 그들 사이에 오갔던 말들의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발단은 마테라치가 지단과 몸싸움을 하다가 지단의 유니폼 상의를 잡아 당긴데 있었습니다. 페어 플레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축구경기에서 자주 있는 일이지요. 이 때 지단은 '내 유니폼 갖고 싶으면 나중에 줄께'라고 말했습니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이상할 거 아무 것도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축구선수인 마테라치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롱한 것에 틀림없습니다. 이에 마테라치도 발끈해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나는 네 누이를 갖고 싶다'. 훨씬 노골적으로 무례한 말입니다. 지단이 머리로 들이받을 만한 말입니다.
무례함의 핵심은 이렇게 상대방을 누르고 아프게 해서 결과적으로 자기를 상대적으로 높이려는 의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례한 사람도 아무에게나 무례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지위와 신분상승에 보탬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합니다. 도가 지나치면 갖은 아부와 아첨을 다합니다. 반면 나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거나 나의 위치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에겐 아주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소위 속물근성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죠. 또는 상대방의 도덕성 혹은 경건성 정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사람 특히 위선적인 사람만 만나면 눈에 불이 납니다. 말이 함부로 나갑니다. 우선 주먹부터 한 방 날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원래 그런 과의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러한 무례함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례함은 두 가지 점에서 무섭습니다. 첫째, 무례함을 당하는 사람의 인격을 사정없이 짓밟아 깊은 상처를 줍니다. 심지어는 자살하게 까지도 만들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점에서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지요.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모 대기업 사장이 대통령의 형에게 찾아와 청탁을 한 것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 때 표현이 무척 무례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 후 그 회장은 한강에 투신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회장의 비리나 자살행위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무례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우리들 마음에 새기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례함을 단지 예의가 좀 없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례함이 무서운 두 번째 이유는 매우 역설적입니다만 극도로 무례한 사람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내는 일군의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례로 말하자면 히틀러를 능가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독일 국민들이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우리 역사로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떠했습니까? 정적들과 비판적 국민들에게 사정없이 무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대중들은 어설프게 무례한 사람에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그룹에 속합니다. 그러나 넘치는 확신으로 남을 무례하게 짓밟는 사람에게선 묘한 카리스마를 느낍니다. 소위 마조키스트적 즉 자기학대적 쾌락입니다. 학대받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한 권위를 필요로 합니다. 그 권위를 상실할 때 빈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갈증을 갖게 됩니다. 그 공간을 파고드는 것이 극도로 무례한 권위입니다. 속이 허한 사람들은 무례함을 권위로 착각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안도감을 느낍니다.
2. 사랑은 무례를 이기게 하는 힘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가장된 무례함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무진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한번 화끈하게 사랑해주면 곧 다시 풀릴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하며 무례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데로 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군림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으로 무례함을 잘 극복해나가는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기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알아갈수록 사랑을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1. 건강한 자아추구
건강한 자아추구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알고자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매우 건강한 노력입니다. 자기를 알지 못하곤 올바른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할 수도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두 번째 건강한 자아추구의 모습은 적절한 자기성취의 노력입니다. 자신이 간직한 삶의 비전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자신을 가꾸는 노력도 포함됩니다. 사랑은 이런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성취의 노력이 도가 지나치면 곧 살펴보겠지만 사랑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하여 상대방을 자기성취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도 우리 자신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자기성취의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2. 사랑이 요청하는 자기포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자기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더 고상한 목적 즉 사랑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계발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포기하는 극히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성취를 위해 정진하되 그 자체를 결코 우상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자기포기의 능력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에 흠뻑 젖어 자기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사랑은 쉽게 열 받지 않습니다
오늘 주제는 다른 사람 혹은 어떤 특정 대상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가 그에 대해 종종 보이는 반응을 다룹니다. 쉽게 열 받는 것입니다. 자기 분을 제대로 삭혀내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것이죠. 물론 각자 성격과 취향에 따라 자신을 쉽게 열 받게 만드는 대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아내는 전혀 열 받지 않는데 나는 열이 펄펄 납니다. 그 반대가 사실일 때도 있습니다. 또 같이 열 받아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열 받았을 때 그 표현방식도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열 받을 때 씩 비웃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든지 손에 잡히는 것을 내 던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쉽게 열 받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우리는 쉽게 열 받는 것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곧 살펴보겠지만 쉽게 열 받는 것은 나 자신을 비롯해 모든 사회적 관계 그리고 국가간의 관계에도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쉽게 열 받는 것은 정당한 분노와는 다릅니다
우선 사랑이 거부하는 '쉽게 열 받는 것'을 정당한 분노와 혼돈해선 안 됩니다. 정당한 분노란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보면서 상당 기간 참다가 관련 당사자에게는 미운 마음이나 적대감을 품지 않고 그 자체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정당한 분노까지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저지하지 않습니다.
2. 쉽게 열 받음이 삶에 미치는 폐해
첫째, 자기 자신이 정서적으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작은 일들에 쉽게 마음이 상하고 노여움을 품게 됩니다. 세상은 크고 작게 나를 열 받게 만드는 일로 가득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병목현상에 걸린 출구로 빠져나가려고 오랫동안 줄을 섰는데 한 참 뒤에서 오던 차가 고의적으로 내 앞으로 싹 새치기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남 약 올리는데 능숙한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자기 잘못은 절대 시인하지 않으면서 상대방 약점만 콕콕 찌르거나 두들겨 패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상대의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를 부각시켜 이슈화함으로 그 뒤에 자신의 훨씬 더 큰 잘못을 살짝 숨겨버리는 것이죠. 비열한 언론인, 정치인 심지어 교계지도자들 조차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상대방 말 몇 마디를 꼬투리 잡아 누가 보더라도 문제가 있는 제3의 사람으로 둔갑시켜 놓은 다음, 그를 마구 비판하여 그로 하여금 엄청난 오해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소위 색깔 덧입히기가 바로 그런 수법입니다. 같은 일도 자기가 하면 로맨스로 미화시키고 남이 하면 스캔들로 모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 관계의 파괴적 악순환을 불러옵니다. 열 받으면 이런 저런 방법으로 결국 분노를 표출해 상대의 마음에 상처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물론 그가 먼저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상처받아 싸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이는 결국 인간관계를 파괴적인 악순환의 구렁텅이로 던져버리게 만듭니다. 노사관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에 잘 안 풀리는 갈등관계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피차간에 쉽게 열 받는 것 때문에 불필요하게 악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평화적 관계자 정착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분단과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피차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대학시절의 교련시간 그리고 군대생활, 통 털어서 13년간 '때려잡자 김일성', '초전박살'을 밥먹듯이 외치며 지냈습니다. 북한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이 가슴 속 깊은 곳에 켭켭이 쌓여진 셈이죠. 그러니 직접 전쟁을 경험하고 친지가 살해당하고 집과 토지를 빼앗긴 세대는 어떻겠습니까? 북한이 조금만 도발적인 행동을 해도 열이 콱콱 바칩니다. 햇볕정책 혹은 포용정책이 완벽한 외교정책은 아닐 겁니다. 보완해야할 점도 있겠고 비판받아야할 점이 있다면 비판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깊이 우려가 되는 것은 아직도 적지 않은 국민들의 마음 밑바닥에 치료받지 못한 상처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더 슬픈 것은 교계지도자들이 시청 앞 광장에 성도들을 동원하여 아무런 여과 없이 동족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신앙의 이름으로 쏟아놓음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열을 더 받습니다. 꼭 그 만큼 북한과 남한의 화해의 길은 멀어지고 통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국과 아랍인들과의 관계도 그래서 걱정입니다. 역사적으로 누가 먼저인지 밝혀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아무튼 피차 서로 쉽게 열을 받아왔습니다. 그 와중에 참혹한 9.11 비행기 테러가 발생했고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도 폭력의 악순환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점점 꼬여만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열 받는 것은 개인, 공동체, 국가 그리고 지구촌에 치명적 폐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열 받는 심리현상은 반드시 치료받아야할 점입니다.
3. 사랑은 쉽게 열 받는 심리를 치료하는 능력
열 받는 심리를 치료받으려면 우선 그 궁극적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충족되지 않은 에로스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자기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려는 본능입니다. 이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입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초두에서 너무나 유명한 고백을 했지요.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 까진 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지난 주엔 쉽게 열 받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한번 열 받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두고두고 가슴에 깊이 묻어두는 심리적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앙심을 품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원어의 뜻을 잘 살린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앙심을 품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아주 쩨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화통한 인간이란 점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앙심을 품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꼭꼭 틀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앙심을 품고 살면 우리의 인식여부와 관계없이 쉽게 열 받는 것처럼 나 자신의 삶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1.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정당한 과거사 정리와는 다릅니다
앙심을 품는다는 말은 원문에 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동사는 '로기조마이'인데 문자적 의미는 '목록을 작성한다' 혹은 '계산한다'는 뜻입니다. 동사의 목적어는 정관사와 형용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용사에 해당하는 단어는 '카코스'인데 '유해한, 악한, 무례한, 질 나쁜, 해로운, 파괴적인, 치명적인'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악한 짓들을 마음속에 기록하고 점수를 계산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앙심을 품는다는 것을 불의한 과거사를 정당하게 정리하는 노력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2. 앙심을 품으면 은밀한 달콤함을 즐길 수 있습니다
루이스 스메디스는 그 달콤함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앙심을 품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적어도 악한 짓을 행한 그 사람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강렬한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덕적 우월감을 누릴 순 없습니다. 그를 뒷받침해줄 만한 객관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기록된 타자의 악한 짓들이야말로 그런 역할을 하기에 딱 적당합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했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그 사람보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란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둘째,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계획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 역시 인간의 강한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복수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가장 고상해 보이는 복수는 내게 악한 짓을 행한 사람을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교제를 단절하는 걸 겁니다. 그래도 복수는 어쨌든 도덕적으로 정서적으로 늘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복수를 정당화할 만한 강력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기록된 악한 짓이 바로 그런 근거의 역할을 합니다. 과거의 악한 사건을 다시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만큼 복수에 대한 도덕적 정서적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악한 짓이 내 안에 새겨놓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왜곡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종의 피학대증과 유사한 병적 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전한 모습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자기를 한편으론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역설적으로 학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타자의 악한 짓이 남겨 논 아픈 상처를 어루만질 때, 그런 충동이 부분적으로 해소되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은밀한 달콤함을 즐기며 지속적으로 앙심을 품고 살아갈 때 자기 자신도 파괴되고 인간관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3. 앙심을 품으면 자신과 인간관계가 무너집니다
앙심을 품고 살면 자기가 파괴되어 갑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유정에서 바로 그런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열 다섯 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울며 엄마에게 호소하지만 엄마는 오히려 '계집애가 어떻게 꼬리를 쳤기에'라고 오히려 책임을 딸에게 전가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촌오빠의 아버지 손에 자기 남편 그러니까 유정이 아버지의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잔인한 짓입니다. 그 악한 짓을 마음에 선명하게 기록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정이의 삶은 점점 파괴되어 갑니다. 3 번이나 자살을 시도합니다. 뜻 밖에 사형수 윤수를 만나면서 앙심을 털어 내는 용서의 힘을 얻게 되죠. 비로소 그의 삶에 환한 빛이 비쳐오게 됩니다.
또한 앙심을 품고 살면 인간관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악한 짓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짓을 한 사람에게 분명히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악한 짓을 한 사람을 영원한 원수로 만듭니다.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난 큰아들이 바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의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30)'. 논리적으로 다 맞는 말입니다.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옳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논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의 논리는 동생에 대한 앙심과 원한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형은 앙심 때문에 동생이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 재산을 날려 버린 못된 아들이라는 점 외에 그 어떤 상황과 요소도 고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걸 다 말아먹고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는 점,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점,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여겨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심지어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이미 큰아들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입니까? 그러나 이 중요한 요소들이 큰아들의 논리적 사고에 비집고 들어 올 작은 틈조차 없었습니다.
앙심을 품고 있는 동안 사람은 이렇게 정신적인 면에서 불구자가 됩니다. 아무리 악한 짓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의외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앙심을 품으면 그 다른 면을 포착할 수 있는 넉넉한 시선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악한 짓 속에 그 사람을 묶어 버립니다. 한번 눈 밖에 난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기 좀처럼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앙심을 품고 사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가페 사랑만이 그 해답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4.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에로스 사랑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에로스의 한계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매우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대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결국은 자기욕구충족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로스는 상대가 아무리 소중한 존재일지라도 나의 욕구충족을 거스르는 순간 그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 거부당할 때 에로스는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에로스 사랑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미움과 증오 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무관심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앙심을 품는 것도 에로스가 한계 지점에 도달했다는 표시 중에 하나입니다. 앙심을 품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의 큰아들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는 분명히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라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그토록 성실하게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근본이유는 결국 자기만족에 있었음을 그대로 들어내는 대목입니다. 에로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에로스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우월성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동생의 악한 짓을 그는 결코 놓칠 수도 잊을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에 꼭꼭 기록해